세상 제패한 ‘적그리스도 음료’…알고 마시면 더 맛있어지는 맥주 인문학
  • 김지영 기자·조아라 인턴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4.08.14 10: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혁명·전쟁 스토리 품은 매혹의 거품

“약간의 황을 섞어보라. 영락없는 지옥의 몰약(沒藥)이로다!” 몰약은 고대 미라의 방부제로 사용됐던 ‘죽음의 식물’이다. 중세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지옥의 몰약’이라고 지칭한 음료는 바로 맥주다. 그리스도의 피로 만들어졌다며 포도주를 신성시하는 가톨릭교회의 눈으로 본다면, ‘미개한’ 세계처럼 보인 이집트에서 처음 만들어진 맥주는 ‘적(敵)그리스도’적인 음료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신다’는 뜻의 라틴어 ‘비베레(bibere)’라는 어원처럼 오늘날 전 세계인은 물처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심지어 체코처럼 물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시는 국가도 있다. 고대 맥주는 노예들의 일당이었고, 중세 맥주는 수도원을 먹여 살렸다. 근대 맥주는 노동자와 지식인 간의 소통을 이뤄냈다. 그리고 오늘날 맥주는 바로 돈이다! 2006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맥주는 1330억리터, 500cc로는  2660억 잔에 달한다.  판매액만 2945억 달러, 우리 돈으로 300조원이 넘는다. 엄청난 판매량만큼 각 나라 맥주에 담긴 역사도 다양하다.

#1. 사회민주주의의 주스, 독일 ‘뢰벤브로이’

독일 맥주에는 사회민주주의의 뿌리가 담겨 있다. 독일 노동자는 19세기 바이에른 맥주와 함께 정치의식을 키워갔다. 1848년 바이에른의 하면발효 맥주인 ‘라거비어’가 독일 전역으로 전파됐을 때 ‘1848년 혁명’이 일어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바이에른 주에서 생산한 맥주 중 대표 브랜드가 ‘뢰벤브로이’다.

바이에른의 맥주는 4~12도로 도수가 낮은 점이 특징이다. 도수가 낮기 때문에 취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토론하는 게 가능했다.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술집은 사회적 현안을 놓고 정치 토론을 벌이는 장으로 탈바꿈했다. 정당의 전당대회는 물론이고 노조의 단결대회 등도 모두 맥줏집에서 이뤄졌다. 1890년까지 독일에서는 옥외집회와 시위가 철저히 금지됐는데 그 공간을 맥줏집이 대체했다.

바이에른 맥주는 처음에는 노동자의 술이었다. 하층 노동자일지라도 귀족이 자신보다 더 나은 맥주를 마시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바이에른 맥주는 ‘맥주 앞에서 평등’을 상징하며 민주적인 것으로 칭송받게 되면서 다양한 계층으로 퍼졌다. 1848년 이후 곳곳에서 개선 행진을 벌였는데 그것이 1848년 3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맥주라는 절제의 무기를 손에 들고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목 놓아 부른 게 바로 1848년 혁명이다. 1848년 혁명은 노동자가 실질적인 단결권을 획득하고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자의 정치 조직 결성을 촉진하는 전기가 됐다.

#2. 미국과 체코의 100년 전쟁, 버드와이저

중국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는 ‘버드와이저’다. 흔히 버드와이저 하면 미국을 떠올린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미국의 ‘버드와이저(Budweiser)’는 짝퉁이다. 원조는 체코다.

버드와이저는 원래 체코 보헤미아 남부 도시, 체스케부데요비체(Ceske Budejovice) 시에서 탄생했다. 일명 보헤미아가 낳은 걸작이라고도 불리는 이 체코 부데요비체의 독일식 발음이 ‘부드와이저(Budweise)’고, 영어로는 ‘버드와이저(Budweiser)’다.

미국과 체코 간 버드와이저 상표권 분쟁의 역사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2년 독일계 이민자 안호이저 부시가 미국에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원래 체코의 ‘부드와이저’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1929년 미국에서 출판된 <The King of Beer>를 보면, 안호이저 부시의 친구이자 맥주 기술자인 콘래드(Carl Conrad)가 체코의 체스케부데요비체 지역 수도원에서 맛본 맥주에 반해 수도사에게 배운 제조법을 그대로 본떠 버드와이저를 만들었다고 한다. ‘보헤미아의 걸작’이라는 별칭답게 버드와이저는  단숨에 미국 대표적인 맥주회사로 부상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878년 안호이저 부시사(社)는 세계 최초로 미국에서 ‘버드와이저’ 상표를 등록했다.

결국 버드와이저 상표는 문제가 된다. 1907년 체코 정부는 안호이저 부시를 상대로 버드와이저 상표에 대해 이의제기를 했다. 양 측은 ‘체코는 부드와아저를 미국에 수출하지 않는 대신, 유럽에 독점 판매권을 보유한다’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안호이저 부시 측이 주력 상품인 버드와이저를 유럽에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국가였던 체코가 자유화되면서 다시 촉발됐다. 2차 대전 이후 유럽 시장에 본격 진출해 있던 안호이저 부시로선 유럽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었고, 체코 역시 ‘국민 맥주’인 부드와이저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나라 맥주회사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지금까지 세계 각국을 상대로 상표권 소송을 벌이고 있다. 양측은 최근 10년간 모두 173건의 소송을 벌였다. 체코 측은 소송 전에서 120건을 이겼고 10건은 무승부를 기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0년 유럽연합 재판소가 유럽 시장에서 ‘버드와이저’ 상표 독점권을 체코에 줌으로써 현재 체코가 유리한 상황이다.

#3. 어디에도 없는 착한 맥주, 아일랜드 ‘기네스’

‘술은 사악하다.’ 과거부터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담배·도박과 한데 묶어 ‘죄악 산업(Sin Industry)’이라고 했다. 이 뿌리 깊은 편견을 깬 술이 있다. 매일 전 세계인들이 천만 잔을 마시는 술, 바로 아일랜드 ‘기네스’다.

기네스는 ‘착한’ 기업이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기네스는 징용된 직원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복직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전쟁 중에도 징용된 직원 가족에게 월급의 절반을 지급했다. 1939년 12월 2차 세계대전 당시 기네스는 모든 영국 군인에게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즐기도록 흑맥주 1파인트씩 제공했다.

무엇보다 기네스는 파격적인 직원 복지정책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 최초로 기업 안에 의료진을 둬 직원과 가족이 치과를 포함한 전반적인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곳이 기네스다. 직원들은 회사에서 마사지 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고, 회사가 부담하는 연금·장례비·교육비를 지원받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포츠 설비 및 독서실 이용, 무료 음악회, 간식 제공, 각종 강연 및 오락 프로그램도 지원받으면서 동시에 매일 기네스 맥주 2파인트를 무료로 받았다. 1800년대 중반에는 복지를 개선하는 담당자를 두고, 그들이 직원들의 가정을 방문해 환경이 열악한 직원들을 조사하고, 일부에게는 직접 주택을 지어 이주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기네스는 이런 공익 사업을 전개한 덕에 죄악 산업의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맥주가 될 수 있었다.

#4. 식민지 아픔이 담긴, 중국 ‘칭다오’

중국은 짝퉁의 나라로 악명 높다. 하지만 중국인은 맥주만큼은 꼭 중국 제품을 마신다. 그만큼 중국의 민족주의는 유명하다. 실제로 중국에서 생산된 맥주 대부분은 중국에서 소비된다. 중국인 1인당 소득이 10% 증가할 때마다 1인당 맥주 소비량이 1.5리터씩 늘어난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술은 ‘칭다오’다.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칭다오 맥주는 브랜드 가치만 805억 위안(약 13조원, 2013년 기준)이다. 주룽지 전 중국 총리가 “소비재 기업으로 글로벌화에 성공한 두 개의 중국 기업 중 하나”라고 격찬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중국의 칭다오는 사실 외국 자본이 만든 술이다.

117년 전 독일 군대가 중국 칭다오 시를 점령했다. 독일은 물이 좋은 칭다오 시의 잠재력을 알아챘다. 점령하고 4년이 지난 1903년 독일·영국 사업가 몇몇은 40만 멕시코 은화달러를 투자해 맥주회사를 차린다. 최초의 칭다오가 외국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세상의 중심(中國)’이라고 국가 이름을 지을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중국인에게는 아픔이다.

침략의 상흔과는 별개로 칭다오 맥주 맛은 가히 세계 최고였다. 칭다오 맥주는 생산한 지 2년 만인 1906년 뮌헨 국제전시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좋은 물과 수준 높은 제조 기술이 빚어낸 결과였다. 칭다오 지역 인근에는 라오 산이 있는데 칭다오 맥주는 이 라오 산의 맑은 광천수를 쓴다. 여기에 독일 맥주 생산기술이 더해졌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칭다오 맥주는 또 한 번 주인이 바뀐다. 이번에는 일본군 손에 넘어가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 ‘대일본밀주주식회사’가 칭다오 맥주공장을 인수해 생산했다. 칭다오 맥주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에야 중국 정부군에 반환됐다. 오늘날 ‘칭다오 맥주회사’란 이름도 그때 얻었다.

현재 칭다오 맥주는 세계 80개국에 판매되며 중국 맥주 수출의 50%를 차지한다. 전 세계 맥주 판매량의 25%가 중국산이니 4명 중 1명은 지금 중국 맥주를 마시는 셈이다. ‘대륙의 술’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외국자본이 만들었다는 칭다오의 출생 비밀은 중국인에게는 굴욕적일 만하다.            

 


참고자료

<맥주, 문화를 품다: 벽을 허무는 소통의 매개체 맥주와 함께 하는 세계 문화 견문록>, 무라카미 미쓰루, 2012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 : 조금은 정치적이고 목구멍까지 쌉싸름한 맥주 이야기>, 야콥 블루메, 2010

<착한 맥주의 위대한 성공, 기네스>, 스티븐 맨스필드 , 2010

<중국 기업 명가 시리즈 3, 칭다오 맥주: 110년 역사>, 서유진, 2014

<이코노믹리뷰: Kotra Report, 끝없는 버드와이저 상표전쟁>, 김병호, 2007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