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논란, 도와주는 것과 대신 그리는 것은 다르다
  •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23 19:35
  • 호수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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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代作)’ 논란, 작가와 조수가 함께 작업해야 ‘보조자’로 인정

미술계가 또 시끄럽다. 사달이 난 것은  유명 원로가수의 그림에서 비롯되었다. 갑자기 검찰발(發) 기사가 났는데, 이름하여 ‘조영남 대작(代作)’ 사건이다. 세상에 대작이라니. 어느 작가의 그림을 다른 사람이 대신 그려주었다면 이것은 범죄고 사기임에 분명하다. 

 

이번 사건은 일단 그려주었다는 송 아무개라는 작가의 주장만 있을 뿐, 여러모로 따져보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신 그려준 것인지, 아닌지, 또 그려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용인되는 범주를 넘어선 것인지, 아닌지를 면밀하게 가려야 한다. 이렇듯 찬찬이 따져보고 논의를 해야 할 사안에 대해 성급하게 답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 답은 오답이 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숱한 언론들은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 나머지 근거도 불분명한 말들을 속보로 쏟아냈다. 여기에는 미술계의 허명(虛名)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남보다 앞서 SNS를 통해 의견을 표명하면서 언론과 대중을 부추겼고, 거기에 한 술 더 떠 ‘나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이라는 전제 아래 말을 시작하는 일부 식자연(識者然)하는 사람들이 나서고 이를 보태거나 때로는 거두절미한 채 보도하면서 일은 더 커졌다. 

 

 

원로 가수 조영남이 대작(代作) 논란에 휩싸인 채, “미술계의 조수 관행”이란 그의 해명이 또 다른 쟁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연합뉴스

 

조수 두는 건 개념미술·설치미술 등에 국한

 

여기에 더해 섣부른 조영남의 해명은 미술계는 물론 국민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른바 미술계에서 용인되는 조수, 즉 어시스턴트를 두고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예를 들면서 이를 관행이라고 말한 것이다. 적어도 관행이 되려면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자 여러 사람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에서 일부 작가들이 해오는 작업방식을 일반화하면서 거개의 모든 화가들이 조수를 두고 남을 시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오해를 받게 한 것이다. 자기 혼자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조수를 두는 게 관행’이라는 말은 부분을 전체화하는 모순이다. 

 

일단 미술계에서 조수나 어시스턴트라고 부르는 보조자를 두는 경우, 현대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용인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개념미술(槪念美術·Conceptual Art)이나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나 팝아트(Pop Art), 그리고 비디오나 미디어아트, 설치미술 등에 국한되어 있다. 또 연로한 작가들의 경우 문하생이나 보조자를 두고 작업을 돕도록 하고 있지만, 이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켈란젤로나 루벤스, 렘브란트 등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오늘날 제프 쿤스나 데미안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아니쉬 카푸어 등 유명 작가들이 스튜디오에서 많은 보조자를 두고 작업을 하는데, 이들의 이런 작업방식에 대해 미술계가 용인하는 것은 그들 작업의 개념 자체도 그렇지만 작가의 역량 또한 뛰어나기 때문이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경우, 자신의 보조자인 이정성이나 폴 개린을 자랑하듯 밝히면서 그들이 없으면 자신의 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설치미술이나 대규모의 작품에는 보조자가 필수적이며 작품에 따라서는 일반인들이 자원봉사로 작품제작에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한 규칙이 있다. 어떤 작가라 하더라도 보조자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하는 경우,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작업한다. 특히 보조자들이 경우에 따라 작가에게 묻거나 할 경우 바로 답을 해주거나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이거나 고쳐 그리기도 한다. 만약 작가가 외출을 해서 보조자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경우 작가가 돌아올 때까지 작업을 멈추고 기다린다. 따라서 보조자가 작업하는 동안 그 장소를 작가가 장악하고 있느냐 아니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보조자들이 어디 가서 “내가 그렸다”라거나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작업의 양이나 내용 면에서 스스로의 역할이 그 작업에서 결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영남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오리지널은 내가 그리고, 그걸 찍어 보내면 똑같이 그려서 다시 보내 준다. 그리고 내가 손을 다시 봐서 사인을 하면 내 상품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판화 개념도 있고 좋은 것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나눈다는 개념도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원화를 토대로 판화를 제작해서 에디션 넘버를 붙여 전시하고 판매하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찍어 보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의 고화질로 어떤 방식으로 보냈는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 사인을 하면 자기 상품이 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상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예술을, 미술을,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보조자가 작업을 하는 공간에 함께 있지 않았다는 점, 속초라는 물리적으로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보조자가 스스로 원작사진을 보고 작업했다는 것은 이른바 미술계의 관례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또한 보조자들을 둘 경우 일이 있건 없건 월급 형식으로 급여를 제공한다. 한 점당 10만원 정도를 지급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미술계 관례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무분별한 ‘아트테이너’ 양산이 초래한 화근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작업이 과연 보조자, 대작가를 두고 제작할 수 있는 영역의 작품이냐 하는 점이다. 그의 작업이 개념이 중시되는 미니멀리즘이나 팝아트에 속하는가의 문제이다. 일단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상 미니멀리즘이나 개념미술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팝아트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그의 그림이 화투라는 일상의 오브제를 콜라주 형식으로 붙인다는 점에서 일견 팝아트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평면회화, 타블로(Tableau), 즉 그림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팝아트로 분류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사실 팝아트가 보기에는 쉽지만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논할 정도로 의미심장한 미학적·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사실 누구나 스스로를 화가라고 칭할 수 있고, 작품도 발표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등단과 비평이라는 절차가 필요하다. 이런 절차가 무시된 채 사회가, 언론이 먼저 작가로 인정함으로써 이른바 ‘아트테이너’들이 마구 양산되는 상황이고, 이번 논란도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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