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 '쌍어 문양'의 비밀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1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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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 신화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파사석탑과 쌍어문

《가락국탐사》의 저자 이종기가 처음 고대 한반도에 활발한 해양활동이 있었을 가능성을 탐구해서 제시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두 가지 아이템이었다. ‘파사석탑(婆娑石塔)’과 ‘쌍어문’(雙漁紋). 

 

파사석탑이란 수로왕을 찾은 인도 공주가 배를 타고 와서 가락국에 발을 들인 후 자신의 배에 싣고 온 돌들을 내려 쌓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돌탑의 이름이다. 앞서 본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그런 대목이 없지만, 같은 삼국유사 안에 ‘금관성의 파사석탑’이라는 항목에서 나오는 얘기다. 이번에도 원문을 번역문으로 직접 읽어보자.​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왕비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서기 48)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애초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해 가려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아버지인 왕에게 되돌아온 이유를 아뢰자 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곧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으로 와서 정박하였다. (중략) 탑은 사각형에 5층인데, 그 조각은 매우 기이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매우 연하여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

역시 《가락국기》처럼 신화적인 내러티브와 역사적인 디테일이 섞여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글을 쓴 일연은 호계사에 가서 파사석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라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가 망하고 유교국가인 조선의 시대가 되자, 오래 된 훌륭한 불교 사찰들이 하나하나 쓰러져갔다. 5세기에 세워져 약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호계사도 1873년 폐사됐다. 그러자 당시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파사석탑은 인도에서 온 허황후가 가져 온 것이므로 수로왕비릉 근처에 있어야 한다고 하며 그리로 옮겼다고 《동국여지승람》은 전한다.​

 

경남 김해 김수로왕비릉 앞의 파사석탑. ©한국관광공사


김해부사 정현석이 파사석탑을 어떤 형태로 옮겨서 보관했는지 알 수 있는 사료는 없다. 어쨌든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70대 초까지 파사석탑은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며 간신히 존재를 이어온 것 같다. 이종기의 《가락국탐사》에 실린 파사석탑의 사진은 그야말로 ‘수로왕비릉 근처’에 놓인 돌무더기 모습에 지나지 않았던 석탑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일연이 그랬듯이 이종기도 한 눈에 이 돌들이 한반도에서 나는 게 아니라는 점을 확신했다. 그와 함께 《삼국유사》에 전하는 인도 공주 얘기가 설화가 아니라 ‘사실(fact)’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계기가 된 ‘쌍어문(雙漁紋)’은 말 그대로 한 쌍의 물고기 문양이다. 수로왕을 모신 사원 벽화의 일부인데, 파사석탑처럼 보이는 것을 사이에 두고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는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물론 수로왕 사원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여러 번 개축됐겠지만, 이런 경우 새로 벽화가 그려진다 하더라도 이전에 있었던 이미지를 그대로 그리면서 조금씩 다른 요소들이 붙여진다고 한다. 이종기의 《가락국탐사》에 인용된 사원 관리인 얘기다.

 

이종기는 이렇게 물고기가 마주 보는 문양은 우리나라 다른 곳의 불교미술이나 문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착목했다. 그렇다면 이 물고기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당시, 1960년대 말은 지금처럼 해외로 쉽게 나갈 수 있는 때가 아니어서, 그런 이국 문화의 디테일을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그는 한반도 남부에서 해류를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방향에서, ‘아유타’라고 한자로 표기될 수 있는 지명을 가진 고대 국가를 찾은 결과, 인도 갠지스 강 중류의 고대 도시국가 ‘아요디아(Ayodhya)일 것이라는 추정을 내렸다. 아요디아는 약 9000년 전 태양의 신 라마가 세웠다고 하며 아직까지 인도 7대의 신성한 도시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장소다. 수로왕 재임 시기 무렵엔 꽤 역사가 오랜 강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위치한 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두 마리 물고기그림인 쌍어문. ©연합뉴스


이렇게 추정은 했지만 워낙 관련 사료도 없었고, 해외와의 교류도 철저히 제한되는 시절이어서 그의 노력은 진전되기 쉽지 않아보였다. 그러다가 1970년, 시인·소설가·극작가·수필가 등 문인들의 세계적 네트워크인 국제펜클럽 연례 모임이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일이 있었다. 이종기는 여기서 당시 인도 펜클럽 회장이었던 소피아 와디아(Sophia Wadia:1901-1986)여사를 만났고, 여사에게 한반도와 인도 아대륙을 잇는 고대 해양 교류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추론을 펼쳐보였다.

 

2년 뒤, 와디아는 인도 펜클럽의 주관의 강연회를 조직, 그를 초청해서 이 주제에 대해 인도의 역사학자들과 교류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인도 학자들은 가락국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듣고 그가 찍어간 김해 수로왕릉의 쌍어문을 비롯, 인근 유적지의 사진을 보고, 인도 고유의 것인 줄 알았던 이미지들이 한국에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 

 

강연을 마친 후 이종기는 그곳 한국공관의 도움으로, 아요디아를 찾아간다. 뉴델리에서 비행기로 아요디아 인근 대도시인 럭나우에 도착, 거기서 다시 버스로 100km 떨어진 페이자바드까지 이동한다. 페이자바드는 9세기 회교도가 침입했을 때 아요디아 서쪽 외곽에 지은 행정도시다.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버스에서 내린 이종기의 눈에 익숙한 이미지가 들어왔다. 모든 것이 회교식으로 지어진 도시, 하지만 그 시가지로 통하는 성문 위쪽에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인도 여행을 마친 이종기는 한반도 서남단에서 인도 갠지스 강 중류까지, 그 먼 거리를 그 먼 옛날에 오가는 뱃사람들이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여기서 그의 필생의 탐사가 시작된다. 그 탐사에서는 수로왕의 왕비, 즉 허황옥 공주의 뱃길에서 시작하여, 일본 규슈 지방과 가락국을 잇는 교류의 흔적 등 해양국가로서 가락국의 위용을 확인하는 작업이 주가 됐다. 그가 개척하는 한반도 해양사의 신세계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그 시대에는 적어도 근동지방 및 아프리카 동북해안에서 한반도와 일본 서남부를 잇는 활발한 해상교류가 있었다는 데까지 확장된다.

 

아요디아 외곽의 고도(古都) 페이자바드로 들어가는 성문. 서로 마주보는 두 마리의 물고기 모양이 선명하다. 이 지역 건물에서는 이런 문양이 많이 발견된다. ©MAPLOGS.COM


 

이런 이종기의 주장이 나온 1970년대 말 이래, 한국 사회에선 여기 대한 논란이 거의 끊어지지 않았다. 주류 국사학계에서는 최근까지 대체로 줄기차게 그 가능성을 부인한 편이었다. 이 주장을 접하면서 바로 이끌려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1970년대와 80년대 언론인 천관우와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 1990년대 한양대학교 김병모 교수, 2000년대 홍익대학교 김태식 교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김태식은 정통 국사학자로서 ‘삼국시대’라는 용어 대신, 거기에 ‘가야’를 추가해서 ‘사국시대’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김해지방을 비롯한 남부 지방의 향토 사가들은 이 가설에 특히 열광해온 편이다. 그들은 이에 덧붙여, 다양하게 해양교류의 흔적을 찾고 새롭게 콘텐츠를 확장하는 데 앞장서왔다. 소설가 최인호를 비롯한 다수의 문인들이 이것을 창작의 모티브로 삼았다. 미디어에서는 다큐멘터리, 모큐멘터리,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이 세계를 펼쳐보였다.

 

그러는 동안 대부분의 대중들이 ‘아, 한반도에도 해양교류의 역사가 있었던 것 같다’는 정도의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앞 회차에서도 말했듯이,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역사적 자료가 너무 없다 하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맞는 얘기다. 지금까지 주류 학계의 관행이었던 실증주의적 역사 고증 방법에 의하면 그렇다. 

 

하지만 지난 세기 말부터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좀 더 통합적인 접근법을 쓴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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