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총장 “한국 정치, 여자들이 희망이다”
  • 金恩男 기자 ()
  • 승인 2000.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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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인천 출생. 수도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1년부터 인천 지역에서 노동운동 시작. 인천여성노동자회 사무국장. 1994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파견.
숙원 사업이라 할 만한 ‘여성 30% 할당제’를 쟁취한 여성계의 분위기는, 의외로 담담하다. 군 가산점 파동 이래 ‘역차별’을 부쩍 외치는 남성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무조건 환영할 수만은 없는 속사정이 있는 것일까. 할당제 도입에 앞장서 온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인순 사무총장을 만나 보았다.


지난 2월8일 국회가 여성 30% 할당제(전국구, 시·도 비례대표)를 통과시키기까지 여성계가 우여곡절을 겪었다죠.

할당제 도입에 여성계가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94년 8월 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성유권자연맹 등 56개 단체가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를 결성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 여성단체는 정치 및 고용 부문의 높은 진입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할당제라는 과도적인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습니다. 그 결과 이듬해 치러진 지방의회 선거부터 여성할당제가 부분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당헌·당규에 여성할당제를 집어넣은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에 1998년 여성단체 대표들이 국민회의 정치개혁특위에 참여하면서 여성할당제를 정당법에 못박아 달라고 요구했고, 그것이 이번에 관철된 것입니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선거법 개정 가이드라인에 여성할당제를 명시한 것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최근 야당이 ‘시민단체-현정권 유착설’을 제기했는데, 여당 특위에 참여한 여성단체의 그같은 전력 또한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닙니까?

오해입니다. 당시 한나라당이 정치개혁특위를 만들고 여성단체에 참여를 요구했다면 우리는 거기에도 기꺼이 응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여성 할당제가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인데요.

100% 낙관하기에는 이번 법 개정에 한계가 많습니다. 여성계는 할당제의 전제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해 왔습니다. 현재의 지역구 중심 선거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여성 할당을 적용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요. 지역 정치를 극복하고 정당 운영이 정책 중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이 필수인데, 그것이 무산돼 버렸습니다. 여성 할당 순번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불안 요소입니다. 1998년 서울시 의원 선거의 경우 한 정당은 비례직 순위 1번에 여성을 배정한 뒤 2∼9번까지 모조리 남성으로 채워 넣었어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지요. 실질적인 당선권에 여성을 포함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홀짝으로 맞물리게 순위를 선정하는 ‘지퍼 시스템’을 도입하고, 이를 당헌·당규에 명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할당제가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아니냐고 주장하는데요.

역차별은 정치·공직 부문 여성 진출 비율이 30∼40%를 넘은 선진국에서나 나올 수 있는 주장입니다. 1998년 유엔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국회의원 여성 비율은 3.7%로, 세계 1백7개 나라 가운데 97위입니다. 할당제가 도입된다 해도 기존 전국구 의석의 30%라면 기껏해야 14석 남짓, 이는 전체 국회의원(2백73석)의 5%에 불과한 숫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할당제 도입 이후가 될 것 같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쓸 만한 여성 인력이 없다’고들 하는데요.

여성단체 또한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밀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국회에 진출한 여성들 얘기를 들어 보면, 여성 관련 정책이나 법을 통과시킬 때 여성 의식이 없는 여성 의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특정 사안에 대해 여성 의원이 반대하고 나서면 남성 의원들이 여성끼리 분열되어 있다는 이유로 동의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따라서 성 평등 의식이 확고하고, 정치·사회 개혁 의지를 가진 여성이 앞으로 공천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할당제를 둘러싼 설왕설래에도 불구하고 최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녀 후보의 능력이 비슷해 보일 경우 여성 후보를 찍겠다’는 응답이 무려 39%(‘남성을 찍겠다’는 14%)에 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극적으로 현행 정치 구조에서는 여성의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은 돈을 끌어들이고 계파를 챙기는 현재의 정치 지도자상과 거리가 멉니다. 그렇지만 여성은 ‘삶의 정치, 일상의 정치’ 곧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구현할 자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희망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반 국민의 정치 혐오가 심각한 상황인 만큼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지방 의회에 진출한 많은 여성들이 보스가 아닌 유권자를 의식하는, 소신 있는 의정 활동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바람에 발언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거나 사전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등 동료 남성 의원에게 ‘왕따’를 당하는 여성도 상당수 있습니다. 당론을 어기고 소신 있게 행동한 일부 여성 국회의원의 움직임도 유권자가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였음직합니다.


기존 정치판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을 텐데요. 지난해만 해도 동성동본 금혼과 군 가산점 규정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국회 법사위와 당정 협의에서 각각 뒤집히는 등 여성계가 정치권에 여러 차례 뒤통수를 맞지 않았습니까?

두 사건이야말로 정치권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자, 이념이나 정책이 아닌 표만을 의식하는 집단임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여성계는 이를 통해 정당명부 비례제가 하루빨리 도입되고, 한국 정당이 정책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다듬었습니다. 인적 구조의 한계 또한 절감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윤락은 결국 필요악 아니냐’ ‘여성에게도 성폭력을 유발한 책임이 있지 않느냐’ 같은 발언을 공식석상에서 내뱉는 저질 의원에 대해 여성계가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정치권이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뒤집는 것을 보며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여성단체가 낙천·낙선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도 이들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군 가산점 파문 이래 여성단체에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남성이 늘었습니다. 유치한 매도를 일삼는 남성도 문제지만, 이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에 여성단체가 너무 안이하게 대응한 것은 아닙니까?

군에 대한 남성의 피해 의식이 그토록 클 줄은 몰랐습니다. 가산점 논란을 성 대결로 몰고 간 언론, 군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을 금기시해 온 사회 분위기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한몫 했다고 봅니다.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나서서 해결할 문제이겠지만 군 가산점 파문을 어떻게 풀어 내느냐가 여성운동의 향방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봅니다. 여성운동은 여성의 권익만을 신장하려는 운동이 아닙니다. 남성 또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억압받아 온 피해자인 만큼, 남녀 공히 고정되고 강요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서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여성운동입니다. 따라서 21세기 여성운동은 부문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는 운동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한 예로 전세계 여성단체는 세계화로 야기된 빈곤과 폭력 문제를 최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 여성단체연합은 호주제 철폐를 올해 중점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호주제는 여성에게 불리할 뿐 아니라 핵가족·편부모 가족 증가 등 오늘날 가족 제도의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못하면서, 남녀 모두에게 정신적인 폭력을 가하는 제도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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